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피로스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는 파브리키우스 씨족 출신으로, 로마로 이주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루스키누스는 여러 차례 집정관을 역임하며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움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타란토와의 외교적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했다. 또한, 헤라클레아 전투 이후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와 협상하여 포로를 교환했으며, 피로스는 그의 청렴함에 감명받아 포로를 몸값 없이 석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감찰관으로 활동하며 청렴한 삶을 살았고, 로마 공화국 초기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피로스 전쟁 - 베네벤툼 전투
베네벤툼 전투는 기원전 275년 로마 공화정이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를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피로스의 이탈리아 철수와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발판 마련, 그리고 로마 군단의 군사적 우수성을 입증한 전투이다. - 피로스 전쟁 - 피로스의 승리
피로스의 승리는 승리했지만 너무 큰 손실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패배와 다름없는 상황을 비유하는 용어이다. - 고대 로마의 감찰관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세력을 확장한 고대 로마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말년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 고대 로마의 감찰관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케도니쿠스' 칭호를 얻었지만 에피루스 약탈로 비판받기도 하며 로마의 영웅적, 제국주의적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
---|
2. 생애 초기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는 아버지의 이름도 가이우스였다.[6]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인 마그나 그라에키아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로마는 루카니아와도 싸웠지만, 루카니아와 대립하던 그리스 도시 투리오이(en, 현재의 칼라브리아 주 동해안)를 지원하여 주둔 병력을 배치했다. 이 시기는 기원전 286년 또는 기원전 285년으로 추정된다.[7] 마그나 그라에키아 최대 도시인 타레스(현재의 타란토)는 이에 불만을 품고 로마와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기원전 284년, 루스키누스는 타레스에 파견된 특사 중 한 명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원전 282년, 타레스는 투리오이를 공격하여 로마 수비 병력을 몰아내고, 타레스에 입항하려던 로마 선박을 공격했다. 로마는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를 수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선전포고를 하면서 피로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2. 1. 출신 배경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는 파브리키우스 씨족 중 처음으로 로마로 이주한 인물이라고 한다. 파브리키우스 씨족은 라티움 중부의 알레트룸(현재의 알라트리) 출신이다.[6]3. 피로스 전쟁과 외교 활동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인 마그나 그라에키아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로마는 루카니아와도 싸웠지만, 이때 루카니아와 대립하는 그리스 도시 투리오이(en, 현재의 칼라브리아 주 동해안)를 지원하여 주둔 병력을 배치했다. 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기원전 286년 또는 기원전 285년으로 추정된다.[7] 마그나 그라에키아 최대 도시인 타레스(현재의 타란토)는 이에 불만을 품고 로마와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275년에는 켄소르(감찰관)에 취임했다.
3. 1. 타렌툼과의 갈등
기원전 284년, 루스키누스는 타레스(현재의 타란토)에 파견된 특사 중 한 명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6] 그러나 기원전 282년, 타레스는 투리오이를 공격하여 로마 수비 병력을 몰아내고, 타레스에 입항하려던 로마 선박을 공격했다. 로마는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를 수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선전 포고를 했다. 이것이 피로스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같은 해에 집정관으로 취임한 루스키누스는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움(en)에서 승리하고, 타레스가 지배하는 투리오이를 포위했다.[8] 이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거행하는 영예를 얻었다.[9]
기원전 280년, 로마는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에피로스 왕 피로스에게 패배했지만, 루스키누스는 피로스와 강화 협상을 벌였고, 포로 송환과 몸값 지불에 대한 협상도 진행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로스는 뇌물을 받지 않는 루스키누스의 태도에 감명받아 몸값을 받지 않고 포로를 석방했다.[10][11]
3. 2. 군사적 활약
기원전 284년, 루스키누스는 타레스(현재의 타란토)에 파견된 특사 중 한 명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6]그러나 기원전 282년, 타레스는 투리오이(en, 현재의 칼라브리아 주 동해안)를 공격하여 로마 수비 병력을 몰아내고, 타레스에 입항하려던 로마 선박을 공격했다. 로마는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를 수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피로스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같은 해에 집정관으로 취임한 루스키누스는 삼니움, 루카니아, 브루티움(en)에서 승리하고, 타레스가 지배하는 투리오이를 포위했다.[8] 이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거행하는 영예를 얻었다.[9]
기원전 280년, 로마는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에피로스 왕 피로스에게 패배했지만, 루스키누스는 피로스와 강화 협상을 벌였고, 포로 송환과 몸값 지불에 대한 협상도 진행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로스는 뇌물을 받지 않는 루스키누스의 태도에 감명받아 몸값을 받지 않고 포로를 석방했다.[10][11]
기원전 278년에 루스키누스는 다시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이때 피로스는 시케리아(시칠리아)로 건너갔지만, 피로스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레기온(라틴어명 레기움, 현재의 레조 디 칼라브리아)을 제압했다(레기움 포위전)[12][13][14]
3. 3. 피로스와의 협상
기원전 280년,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로마가 에피로스 왕 피로스에게 패배한 후, 루스키누스는 피로스와 강화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에는 포로 송환과 몸값 지불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로스는 뇌물을 받지 않는 루스키누스의 청렴함에 감명을 받아 몸값을 받지 않고 포로를 석방했다고 한다.[10][11]3. 4. 레기움 포위전
기원전 278년, 루스키누스는 다시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때 피로스는 시케리아로 건너갔지만, 피로스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레기온(라틴어명 레기움, 현재의 레조디칼라브리아)을 제압했다(레기움 포위전).[12][13][14]4. 감찰관 활동과 청렴성
기원전 280년,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에피로스 왕 피로스에게 패배했지만, 루스키누스는 피로스와 강화 협상을 벌여 포로 송환과 몸값 지불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로스는 뇌물을 받지 않는 루스키누스의 태도에 감명받아 몸값을 받지 않고 포로를 석방했다.[10][11]
기원전 275년 켄소르(감찰관)에 취임했다. 루스키누스는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함께 금욕적인 인물의 전형으로 자주 언급되며, 키케로는 종종 이 두 사람을 동시에 인용했다. 발레리우스 맥시무스(en)는 루스키누스와 그의 동료였던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가 집에 은을 축적했는데, 각자의 집에는 신들을 위한 식기와 소금 창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루스키누스는 식기 아래에 뿔로 만든 작은 받침대를 두어 더욱 우아하게 보이도록 했다.[15]
4. 1. 감찰관 취임
기원전 275년에는 켄소르(감찰관)에 취임했다.[15]4. 2. 청렴한 일화
루스키누스는 청렴하고 금욕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진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에피로스 왕 피로스에게 패배한 후, 루스키누스는 피로스와 강화 협상을 벌였다. 이때 피로스는 뇌물을 받지 않는 루스키누스의 태도에 감명받아 몸값을 받지 않고 포로를 석방했다.[10][11]
기원전 275년 켄소르(감찰관)에 취임했으며, 금욕적인 인물의 전형으로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키케로는 종종 이 두 사람을 동시에 인용하기도 한다.
발레리우스 맥시무스(en)에 따르면, 루스키누스와 그의 동료였던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는 집에 은을 축적했는데, 각자의 집에는 신들을 위한 식기와 소금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루스키누스는 식기 아래에 뿔로 만든 작은 받침대를 두어 더욱 우아하게 보이도록 했다.[15]
참조
[1]
서적
Ab Urbe Condita
[2]
서적
Pyrrhus
[3]
encyclopedia
Ancient Rome
Microsoft Corporation
[4]
간행물
Fabricius, Gaius Luscinus
[5]
서적
The Portable Dante
https://archive.org/[...]
Penguin Group
[6]
서적
ローマ建国史
[7]
서적
ローマ建国史
[8]
서적
ローマ古代誌
[9]
문서
凱旋式のファスティ
[10]
서적
ピュロス
[11]
encyclopedia
Ancient Rome
Microsoft Corporation
[12]
서적
ローマ史
[13]
서적
ローマ史
[14]
서적
歴史
[15]
문서
Chapter Four "Povert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